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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기고

<논평> 강남역 여성살해 6주기: 지금/여기에서 강남역 ‘페미사이드’를 돌아보며
  • 작성자

    불꽃페미액션

  • 날짜

    2022-05-17

300명.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른 살인, 강간, 강도, 폭행 등 5대 강력범죄로 죽는 여성의 한 해 평균 수치다. 103건. 2021년 친밀한 관계에 의한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중 언론에 보도된 사건 수다(한국여성의전화, 2022). 모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는다. 2021년 ‘한겨레21’이 추적한 여성살해 판결문 347건(선고일 기준, 2016.1.~2021.11.) 중 살해당하기 전 폭력을 겪고 경찰에 신고한 비율이 6.6%에 불과한 것을 고려할 때,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수는 이보다 훨씬 웃돌 것으로 보인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6년 전 오늘, 강남역 화장실에서 모르는 여성을 죽인 남성이 한 말이다. 상술한 여성살해 347건의 판결문 중 300건에 드러난 피고인의 감정적 동기는 강남역 ‘페미사이드’의 범행동기와 유사하다. 무시, 질투, 앙심 같은 '기분'이다. 


'페미사이드' 용어는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여성 대상 범죄 국제법정’에서 처음 공론장에 드러났다. 이후, 세계적으로 이 명칭은 “여성을 상대로 한 젠더 기반 살인”, 대개의 경우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상술한 살해사건은 모두 페미사이드에 해당한다. 특히 대부분의 범행 동기가 가해자 남성의 기분이라는 점은 너무 쉽게 ‘죽일 수 있고 죽여도 되는 상대’가 되는 여성의 사회적/생물학적 위치를 시사한다.


한국에서 페미사이드가 대중에 각인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페미사이드의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다. 그런데도 매년 이를 추모하고 되새기는 이유는, 비로소 제대로 불리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간의 숱한 젠더기반폭력과 여성살해가 ‘집안일’, ‘두 사람 간 문제’, 또는 ‘묻지마 살해’로 지워졌듯, 이 사건 역시 지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피해자와 비슷한 세대인 청년 여성의 목소리에 의해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의 이름으로 광장과 거리에 나와 연대하며 정치하게 했다. 공감력과 동일시를 통한 일종의 자각에서 출발한 연대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문구의 체감이자 실현이었다.


이후 6년, 강력한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재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은 ‘피해자의 말하기’를 통해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가부장적 인식에 균열을 냈고, 성폭력처벌법 개정과 ‘낙태죄’ 폐지를 비롯하여 법과 제도를 바꿨다. 2017년 탄핵, 2018년 지선, 2020년 총선을 차례로 거치며 성평등을 내세운 정치인과 성평등 가치를 포함하는 정책이 꾸준히 발전했다. 그리고 2022년 20대 대선에서 압승하리라 예상되었던 국민의 힘이 0.73%P 차이로 겨우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사실상 패배로 해석된 데는 20대 여성의 표심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패배'라는 해석이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정부의 시작을 막지는 못한다. 윤석열 정부가 성평등 의제와 구조적 책임을 지운 채 말하는 '성범죄 처벌 강화'는 범죄자 개인을 악마화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강남역 페미사이드의 책임을 조현병 환자 악마화로 해소하려던 일련의 흐름과 같다.


2016년 강남역 페미사이드 추모는 한 여성의 죽음에 얽힌 구조적 책임을 직시하며 여성 스스로 이름 붙인 의제와 연대를 되새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성평등 의제를 지우려는 정부를 맞이한 지금, 이 의미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약자를 향한 차별과 배제가 ‘공정’으로 포장되는 이때, 우리의 말하기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하기가 되어야 하나? ‘우리’는 누구이며, 개인이 지닌 다양한 정체성에 중첩된 억압을 가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싸워왔고, 앞으로 어떻게 계속 싸워나가야 할까?


질문에 대한 답을 당장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먼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자의식이 동화를 넘어 연대와 정치로 확장되었던 6년을 돌아보며, 절대 지워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많은 말들 속에서 나의 말을 잃지 말자. 목소리가 어디를 향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하자. 서로의 용기가 되어줄 손을 더 많이 찾아내고 붙잡자. 살아서 함께 나아갈 방법을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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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


*참고자료


엄지원·고한솔·박다해·이정규(2021.12.19). “죽을 만한 일은 없었다 [페미사이드 500건 분석]”. 한겨레21, 1393호.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57.html


한국여성의전화(2022.3.7.). “2021년 분노의 게이지: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

http://hotline.or.kr/board_statistics/7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