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미디어에 '딸바보'란 말이 떠다닌다. 결혼 여부나 자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냥, 다정하고 상냥한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 같은 남자의 이미지가 주류인 듯하다. 그런 남자들, 특히 그런 가정의 이미지를 볼 때면 내가 알던 어떤 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럼 괜히 숨이 막힌다.
이것은 어느 날 연기처럼 증발한 내 친구의 이야기다.
거의 날 때부터 친구였던 그 애는 가족 얘기를 즐겨 했다. 요리를 잘하고 손재주가 좋은 어머니와 상냥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 번듯하고 공부 잘하는 두 살 아래 남동생. 그 애의 집은 교과서 같았다. 그림 같은 집에 어머니가 손수 만든 액자 속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이 가득했다. 그 애의 아버지는 주말을 늘 가족과 함께 보냈다. 그 애는 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녔다. 내가 그 애라도 동네방네 가족 얘기를 떠들고 다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그림 같은 집을 의심한 적도, 깨어지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애가 가족 얘기를 뚝 멈췄을 때도, 그저 사춘기가 왔구나 했다. 갑작스러운 그 애 어머니의 장례식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그 애보다 나였다. 아홉 살 때부터 어머니가 아팠다는 사실을 장례식장에서야 알고도 서운함보다 감쪽같음에 더 충격받았다. 그 후엔 좀 잊은 것 같다. 온 나라가 공부하라고 배려해주는 고등학생답게 입시 생각이 전부였다. 그 애는 장례식이 끝난 날부터 장례식도 가족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가 금방 잊어버리기 좋았다. 열심히 학교에 나오고, 수업이 끝나면 동생 밥 해줘야 한다며 곧장 집에 갔다. 애들은 그 애 동생이 초등학생 남짓인 줄 알았다. 두 살 차이인 걸 알고 나선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했다. 그럼 그 애는 맞다며 웃었다.
그 애가 내게 다시 가족 얘기를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주로 늦은 밤 갑작스레 전화해 독백하듯 떠들어댔다. 나에게 말하는 게 맞는지 헷갈리는 일방적인 이야기 속 집은 이제 교과서 같지 않았다. 그 애의 목소리는 담담할 때도, 웃음기가 감돌 때도, 들떴는지 화났는지 헷갈리게 격앙된 때도 있었다.
처음 미역국 끓였던 날 얘기했나? 뭐가 문젠지 국물 색이 엄청 탁했어. 밥 먹는 내내 엄청 눈치 봤잖아. 아빠랑 동생은 다 맛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그냥 먹어주는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정작 나는 맛이 어땠는지 모르겠더라.
옷을 개서 서랍에 넣어주다 보면 기분이 좀 이상해. 내가 없으면 두 사람은 어떻게 살까 싶기도 하고, 왜 나만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가장 큰 건 미안함이지. 내가 다림질을 못하거든.
이야기 속 그 애는 딸이 아니라 엄마 같았다. 쉽게 사람을 좋아하는 그 애는 늘 짝사랑 중이었지만 정작 그 상대와 사귈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엄마 취급’에 익숙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집에서 엄마는 ‘여자’가 아니니까, 걔도 ‘여자’로 누군가의 곁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지만, 그 땐 그랬다.
어느 날 그 애는 귀가 시간으로 아빠와 자주 싸운다고 했다. 술마시다 늦게 오는 날엔 무조건 싸운다고. 남동생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든 외박을 하든 상관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그 애뿐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듣다 문득,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그 애는 분명 ‘엄마 역할’였다. 생활비를 받아 집에 필요한 것들을 사두며 관리했다. 동생이 기숙사에 들어간 후 주말마다 가져오는 옷 꾸러미를 빠는 건 그 애였다. 이사 갈 때 집을 알아보러 다닌 것도 그 애였다. 그런데 귀가 시간 같은 건 '여자'인 딸로 아버지의 통제를 받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정할 때도 그 애는 딸이었지 엄마가 아니었다. 집을 알아보는 것부터 이사 준비, 이사 후 짐정리와 청소의 8할은 그 애가 했으나 이사를 결정하는 것도 새집을 택하는 것도 그 애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요즘 집안일 하기 싫어서 아침마다 운다고 했다. 목이 다 쉬어 있었다. 그럼 안 하면 되잖아. 내 말에 그 애는 그래도 어떻게 그래, 중얼거렸다. 그냥 투덜대는 거야. 나 혼자 다 하는 것도 아냐. 다들 고마워하니까 나도 뿌듯해. 그 말에 나는 별문제 아니구나 생각했다. 바보 같았다.
꿈을 꿨어. 아빠랑 동생이 이제 난 필요 없다며 나를 버렸어. 둘 뒷모습을 보며 엉엉 울었는데, 깨고 나서 또 그만큼 울었어.
이 집에서 내 존재 가치는 뭘까. 엄마 대신 내가 살아있는 게 괴로워. 더러운 집을 보면 죄책감이 들어. 그걸 나만 느끼는 게 억울한데 그게 당연한 것 같아. 장례식 때 어른들이 했던 말이 부적처럼 따라다녀. 이제 네가 잘해야 한다. 이제 집에 여자는 너뿐이니 네가 아빠랑 동생 잘 챙겨야 한다. 너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잘 못하겠는데 이 이상 할 자신도 없어.
그 애의 엄마는 오랫동안 집안의 누구를 챙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를 챙긴 건 그 애였다. 그 애는 한동안 학교도 안 가고 엄마 곁에 있었다. 매일매일 팔다리를 주무르고 바싹 마른 몸을 안아 화장실에 데려갔다. 그런 엄마를 보낸 자리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나온 그 말들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말이 그 애에게 닿기 전에 가로채는 상상을 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가로채서 사람들의 입에 도로 욱여넣고 싶었다. 그 애의 뇌에 진득이 붙어있을 것들을 다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했다. 화내는 대신 그 말을 부적처럼 안고 사는 애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버지의 상냥함에 기대고 동생을 안쓰러워하여 떠날 생각조차 못하는 그 애를.
동생이 고3이 되던 해, 대학에 안 가고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는 애에게 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냈다. 그 화에는 ‘네 미래나 걱정할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같은 어떤 다정함이 있었을 터이나 말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 애는 살면서 ‘나도 어리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때도 아버지의 화를 그런 쪽으로 헤아리지 못했다. 동생이 대학에 간 후 유학 얘기가 나오자, 유학을 가고 싶어했던 그 애는 바로 포기했다. 집에서 두 명을 보내긴 버거우니 자기가 포기하는 게 맞다고 했다. 동생이 공부도 더 잘하고 미래도 좋으니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애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것이 그 집의 민주주의였다.
그 애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번듯하고 온순하며 상냥했다. 그러니 누구도 그 애에게 엄마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런 심정이 들도록 몰아가지 않았다는 그 애의 말도 사실일 테다. 그들은 그냥, 그 애를 그런 상황에 내버려뒀을 뿐이다. 그 애의 십대는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하려 애쓰던 시절과 엄마가 죽은 후 자기가 딸인지 엄마인지 혼란스러워하며 보낸 시절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들여다봐 주지 못했다.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로 그 애의 괴로움을 퉁치려 했다. 책임질 필요 없는 일에 대해 자책하며 그 애가 질식하는 동안 주변 모두가 그 가족의 선량함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 애가 사라진 건 2017년 즈음이다. 가정에서 자기의 위치를 ‘엄마 역할’로 찾으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엄마 역할'을 그렇게 단정한 게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아빠도 동생도 그런 역할을 부탁한 적 없는데 자처한 꼴이 우습다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대에 여자인 자신은 낄 수 없어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닫자 허무해졌다고 했다. 가족이 조금만 덜 번듯한 사람들이었으면, 차라리 강압적인 사람들이었으면 그렇게 안 살았을 것 같다고 했다. 주변에 엄마 없는 애도 상냥한 아빠를 둔 애도 없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혼자인 게 때때로 몹시 고독하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며 그 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왜 그런 괴로움을 그 애 혼자 느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왜 그 애가 집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찾으려 애썼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딸바보 얘기를 들으면 그 애가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면서 계속 떠올리는 것과 같다. 하나 깨달은 것은, 딸바보 안에 딸이 없다는 사실이다. 거기엔 딸을 애틋이 여기는 아버지의 이미지만 있다. 상냥하게 포장된 애정도 대상을 소유한다는 전제에는 변함이 없고, 소유는 상대의 섹슈얼리티를 일방적으로 통제하며 구체화된다. 귀가시간을 단속하고, 행동거지나 씀씀이를 감시하고, 유흥을 금하는 방식으로. 딸이 자라 누군가의 아내가 되면 아버지는 소유권을 넘기고, 딸이 어머니가 되면 섹슈얼리티는 없는 셈 친다. 그 애의 방황은 섹슈얼리티를 '통제받아 마땅한 딸'과 '거세당한 어머니' 사이에 있었다. 고 생각한다.
뭇 여자들이 나를 망치러 온 구원이라 말하는 페미니즘이 그 애의 방황도 끝냈을까? 이제야 나는 지난 날로 돌아가 그 애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더없이 상냥하게 그 애를 가뒀던 가족과 주변 모든 이로부터 그 애를 데리고 나오고 싶다. 딸도 엄마도 될 수 없어 괴롭다던, 딸이자 엄마로 사느라 괴로웠던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다 벗어나 잘 살아 있는 그 애의 지금을 상상한다. 이기적인 소망이지만 허황된 상상은 아니다. 스스로 구원할 힘이 있는 애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 애는 평범한 한국 여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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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
다정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